혹독했던 서른살, 그리고 마흔 기다리기.... [vja]

혹독했던 서른살, 그리고 마흔 기다리기.... [vja]

94 0 848 2004.03.03 10:00
혹독했던 서른살, 그리고 마흔 기다리기....


스무살을 무척 기다렸다. 아니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었다. 그처럼 ‘잘난’ 척하는 이들이 말하는 대학물을 조금은 먹어 볼 수 있을거란 생각에. 그런데 아니었다. 난 대학에 떨어지고 여전히 시커먼 아폴로도시락과 누렇게 색 바랜 나이키 운동화에 독일군 모자머리를 하고 재수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표현하니 꼭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같다.)
마음을 바꿔 서른 살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스무살을 기다렸던 때와 상대도 안 되게 집요했다. 내 나이 서른 살이면 뭔가 내가 살아갈 인생의 길이 확실히 보일 줄 알았는데. 아! 하늘이 나를 강하게 키우려 하시는지 IMF 대란이 오고 말았다. 나의 서른 살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서른 살이건만.

1998년 봄 나의 친척에게 보증 서준 수천만원이 고스란히 우리(나와 남편)의 몫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월급 차압 후에도 남편에게 말 못하고 있었는데 남편도 나와 같은 상황이 되기 직전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대책을 세웠으나 별로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남편은 직업상 월급이 차압당하면 인사위원회에 회부되어 사유가 불분명할 경우, 치명적인 불이익(권고사직)을 당하게 된다. 지금부터는 보증보험에서 남편 월급을 차압하기 이틀 전 일이다.

만기를 몇 달 앞둔 적금을 해약하고 남편과 나는 각각 몇 명 친구에게 몇백만원씩 무이자로 돈을 빌리기로 했다. 난 그 동안 쌓은 것은 ‘우정’ 뿐이라 한 친구에게 큰 돈을 한 방에 빌릴 수 있었다. 고마운 녀석들. 나의 신속정확한 행보에 남편도 깜짝 놀랐다. (나의 친척보증을 남편과 내가 서고 그 일로 가족이 해체될 뻔한 이 일로 나는 지금까지도 늘 가족의 ‘헤게모니’(권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특히 경제쪽으로는 더욱 그렇다.)

그렇게 며칠 휴가를 내서 급한 불을 끄고 나니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딸과 우리에게 남은 전재산은 달랑 73만원이었다. 다행히 집은 건드리지 않았고. 남편은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그래봤자 말을 알아 듣는 사람은 나 뿐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 때 남편이 나에게 한말을 생생하게 토시 하나 빼지 않고 기억한다.

“물론 또 큰일이 있으면 카드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 또한 돈을 앞당겨 쓰는 것이니 부채나 마찬가지다. 이제부터 우리가족은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에 신경 써야 하니 당신과 아기는 그것만 지켜주면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감동, 또 감동.

그때 남편은 우리나라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석유수입이 금지될 것에 대비해 중고 MTB(산악자전거)를 2대 구입했다. 교통수단이 중단되면 출퇴근 때 써야 한다며. 내가 말하기를, “자기야 석유수입 금지돼서 교통수단 중단될 정도면 돌아갈 회사도 없어. 너무 ‘오바’하지마!” 남편이 피부로 느낀 IMF대란은 이 정도였다.

난 그 후 가끔은 남편에게 ‘가불’을 했지만 회사에서 일비로 나오는 13만5000원으로 한 달을 버티고 있었다. 사실은 바람난 ‘고삐리’(고등학생)처럼 온갖 잔머리를 다 짜서 남편에게 돈을 받아 쓰곤 했다. (참고로, 우리집의 가계는 남편이 운영한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쓸 기회가 있을 듯 하다.) 약 2년간 피나는 ‘긴축재정’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긴장을 풀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강력했다. 남편은 목표로 했던 작은 집 한 채 값의 종자돈을 한 순간에 날리게 되었고 우리의 삶도 그만큼 후퇴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그 때 겪은 충격으로 더욱 보수적인 경제관을 갖게 되었다. 남편은 아직도 IMF와 ‘전쟁중’인 셈이다.

이제 나는 다시 마흔살을 기다리고 있다. 친구들은 내가 빨리 늙고 싶어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이 길다며 다음에는 하루살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나에게 남편은 하루살이로 천년간 매일 태어날 거라고 놀리곤 한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떤가! 크게 이룬 것은 없어도 항상 웃고 있는 아름다운 나이주름을 만들고 싶을 것을.

아! 참고로 내가 스무살을 기다렸던 것은 대학 가요제에 나가고 싶었고 가장 좋아하는 영국의 하드락그룹 퀸(Queen)의 공연을 보러 가서 프레디 머큐리의 각선미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서른살을 기다렸던 것은 돈을 모아 아프리카 여행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흔살에도 여전히 조기은퇴와 무위도식을 꿈꾸고 있을까 걱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흔살이 기다려진다.






211.239.104.85davinci 03/03[10:28]
장문의압박이군녀,,ㅡㅡ; 점심때 일거바야지 ㅋ
220.75.7.245마야짱 03/03[10:56]
피부에 팍~ 와 닿는 이야기군요... 그런 상황에도 의연한 님이 대단해 보입니다
220.75.7.245마야짱 03/03[10:56]
피부에 팍~ 와 닿는 이야기군요... 그런 상황에도 의연한 님이 대단해 보입니다
211.239.104.85닥빈치-_- 03/03[12:26]
흠,,대단하군요,,
218.147.234.188호유화 03/03[13:11]
저도.. 무작정 서른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지요. 서른이 되면 님의 말대로 뭔가가 내앞에 큰길이 뚫려있을것만 같
아서.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이제 저는... 마흔을 기다려야 하나봅니다. 아직 좀 멀긴 했지만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며 기다리면
기다린 보람이 있는 마흔살배기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그때쯤엔 저도 아프리카 여행을 한번쯤 다녀올수 있지않
을까요...괜히 슬프네요.
211.217.143.39쏘스 03/03[14:43]
올 연말씀에 이와 비슷한 글을 내가 쓸수있길,,,,
211.217.143.39쏘스 03/03[14:44]
올 연말씀에 이와 비슷한 글을 내가 쓸수있길,,,,
211.179.171.18094 03/03[17:58]
[vja]<----오타.... [펌]^^ 쏘스님 지금도 좋습니다.^^
211.109.110.224jimi 03/03[21:53]
ㅎㅎ
218.37.6.219조아조아 03/04[01:24]
난 마흔살엔 뭐가 돼어 있을려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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