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얼핏 들은 이야기입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김홍도가 일생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시기에 몇 년간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기간에 일본에는 어디선가 혜성처럼 천재화가가 나타나서 짧게 활동하고는 사라졌다더군요. 남아있는 그림을 보니 김홍도의 작품과 많은 유사성이 발견되고 있다고 하구요. 김홍도라는 인물에 나름대로 호기심을 품고 있다보니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도 궁금해지네요. 혹시 이 이야기에 대해 알고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원 김홍도에 대한 가설입니다. 김홍도가 도슈사이 샤라쿠라는 이름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했다는 것이죠. 이것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는 의견도 있고, 어디까지나 가정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견의 존재 여부를 모르는 일반인이 훨씬 많죠..^^;
※ 첫번째 자료는 안혜정의 일본 미술 이야기..라는 곳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그림과 함께 자료가 나와있는데 상당히 자세하군요. 이 글이 좀 길지만 찬찬히 읽으시고 제가 아래에 찾은 자료들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1794년(간세이<寬政>6년) 5월 어느 날 에도의 극장가에 28점의 오쿠비에(大首繪:얼굴에 테포르메를 가해 그린 그림)를 들고서 홀연히 등장하여 10개월 남짓 140여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또 어느 날엔가 자취를 감춰버려서 행적이 묘연해진 화가가 있었다. 혜성처럼 왔다가 사라져버린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 그의 생몰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늘날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우키요에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었는지 어디에서 왔었는지 또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로서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자료를 파고드는 데는 나름대로 선수인 일본학자들조차도 여지껏 밝혀내지 못하니 그가 사라져 버린 지 200년이 지났건만 우리에게 남겨진건 알다가도 모를 그의 아이러닉한 작품들과 그를 둘러싼 난무한 추측들일뿐이다.
그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10년. 독일의 동양미술 연구자 율리우스 쿠르트(Julius Kurth)가 유럽에 퍼져있는 그의 작품을 모아 『SHARAKU』라는 책을 펴내면서부터였다. 그는 샤라쿠가 노오가쿠(能樂)의 배우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호들갑스러운 일본인들이 새롭게 그의 연구를 시작해 지금은 그에 관한 단행본만 해도 40종을 넘는다한다. 1869년에 출판된 책『新浮世繪類考』에 의하면 쿠르트의 주장처럼 그는 사이토 쥬로베이(齋승十郞兵衛)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노(能)가면극 배우와 동일 인물이며 아와(阿波)의 영주의 비호 아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적인 이야기 또한 구체적인 증거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샤라쿠를 연구하는 학자들만큼 샤라쿠가 많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런데, 최근에 이영희(한일비교문화연구소장)에 의해『또 하나의 샤라쿠』가 토쿄의 하출서방신사에서 발간되었다. 이영희 교수는 그가 바로 조선의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라는 학설을 주장해서 관심을 끌었지만 설득력있고 명쾌한 답변은 나오지 않는게 현실이다. 그의 주장으로는 단원이 1794년에 정조의 신임으로 연풍현감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정조의 밀명을 수행하는 한편 토슈사이 샤라쿠란 이름으로 활약했다고 것인데, 실제로 이 기간동안 단원의 국내활동이 알려지지 않아서 샤라쿠가 단원이라는 설에 한몫을 거든 것이다.
신비의 화가 샤라쿠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어느 정보일까.
부산에서는 일본과 가까운 거리탓으로 크고 작은 기획전을 통하여 일본의 작품들이 소개되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그 중 81점의 작품을 가지고 <寫樂再見(샤라쿠再해석전)>이 1997년 6월 27일- 7월 6일까지 국제신문 문화센터에서 열렸지만 부산과는 너무 먼 거리탓인지 이곳 광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샤라쿠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18세기말 에도에서는 극장 시즌이 시작되어 가부키(歌舞伎)공연이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다. 가부키는 야쿠샤(役者)로 불리는 배우의 목소리(歌)와 몸짓(舞) 연기를 통해 폭넓은 기교(伎)를 드러내는 일종의 연극이다. 당시의 지배계층인 귀족과 무사계급이 즐기던 부가쿠(舞樂 : 왕실무용)나 노(能 : 전통연극)의 섬세한 동작의 우아함과는 다른 화려한 구경거리로서 변변찮은 놀거리도 없던 에도의 시민들을 흥분시키기에 매우 적합하였다.
대중들은 가부키 공연뿐만 아니라 그 주연배우들에게도 열광하였다. 유명한 배우들의 각각 새로운 배역을 보이는 초상화들은 에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의 극장관람자들이 많이 찾는 그림이었다. 그들의 브로마이드로 여겨지던 야쿠샤에(役者繪: 배우그림) 제작은 당시 우키요에 화가들의 최대의 일거리였다. 어떤 화가가 에도의 유명극장에서 활약하던 주연배우를 잘 그려내는가가 화가로서의 성공여부와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에도의 대표적인 야쿠샤에 작가는 우타가와 토요쿠니(歌川豊國:1769-1825)로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토슈사이 샤라쿠의 등장으로 그의 인기에 위기가 닥쳤다면 과연 우타가와 토요쿠니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둘은 굉장한 라이벌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어쨌든지간에 이 두 화가의 그림은 주제부터 표현기법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점을 많이 보이고 있다.
<오오타니 오니지(大穀鬼次)>는 샤라쿠의 대표작으로 상대역의 돈을 빼앗으려는 자세를 묘사하고 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 치켜떴지만 가운데로 모인 눈동자의 우스꽝스러움 때문에 치켜든 눈이 민망하고, 오기창창함을 보이면서 한 일자로 꽉 다물어버린 입술, 돈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쫙 벌려 내민 손은 상황의 긴박함이나 두려움을 전달하기보다는 해학적일 수밖에 없다. 정확한 관찰로 개성을 강조하는 것, 배우의 단점까지도 그대로 드러내고야 마는 것이 샤라쿠만의 개성적인 특징이었다. 당시 가부키의 인기 배우를 그린 우키요에 판화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기 연예인의 브로마이드로서 당시 모델들의 모습은 아름답거나 혹은 늠름하게 과장되어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샤라쿠의 오쿠비에는 인기 배우에서 단역에 이르기까지 그 모델의 내면을 파헤치는 듯한 리얼리즘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예리한 시선이 담겨있다. 샤라쿠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얼굴이고, 거기에 드러나 있는 것은 그 얼굴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이다. 말하자면 그는 배우라는 인간의 얼굴을 통하여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그릴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이 당대에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이 이토록 형편없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다면 웬만한 골수 매니아말고는 이런 야쿠사에를 사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멋진 모습이 담긴 그림이 좋을 수밖에... 짙은 화장으로 본얼굴을 감춘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신비한 매력을 사라지게 한 샤라쿠는 골치 아프고 반갑잖은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샤라쿠가 10개월만에 사라진 이유를 무한 경쟁에서의 자연도태로 보는 설도 있다. 그러면 당시 대중의 취향에 맞춰서 아름답고 우아하게 그려냈다면 샤라쿠의 존재는 지금껏 알려질 수 있을까? 그후 이 비운의 화가는 당시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 걸작들을 많이 남긴 채 예술세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대담하게 테포르메(자연의 형상을 예술적으로 변형하는 것)하고 개성이 강한 오쿠비에는 지금은 일본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광고탑과도 같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게 되었다. 샤라쿠가 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의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가부키에서는 극이 진행되다가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정지자세를 얼마간 취하게 되는데 이 자세를 미에(見得)라고 한다. 주연 배우는 각자의 대표적인 미에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토요쿠니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인 이 미에의 자세를 전신상으로 그렸다. <고라이야(高麗屋)>와 <야마토야(大和屋)>는《役者舞臺之姿繪》라는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이다. 토요쿠니의 출세작인 이 시리즈는 샤라쿠가 사라진 이후로도 계속 제작되었고 이때부터 토요쿠니는 최고의 야쿠샤에 작가가 되었다. 대중들은 극중의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을 잡아낸 이 멋진 미에를 갖고자 했으며 이 수요에 발맞춰서 토요구니의 손놀림도 바빠졌을 것이다. 스타를 열광하는 팬의 눈으로 본다면 배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한 토요쿠니의 작품을 사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토요쿠니가 지속적인 사랑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그려내던지 간에 한동안의 경쟁자였던 샤라쿠는 사라졌기에 샤라쿠식 오쿠비에를 그려내는 과감성도 보여주지만 그의 손맛은 샤라쿠와는 다르기에 어쩐지 맥이 빠져버린 느낌이다.
1890년 파리의 에콜 드 보자르에서 일본판화전이 열려서 소장자들이 가지고 있던 샤라쿠의 판화가 공개되었을 때, 화가 툴루즈 로트렉은 찬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소장가들을 찾아 다녔고, 기메 미술관에서 어느 유태인 소장가가 가지고 있던 그림을 통해 샤라쿠와 더욱 깊은 만남을 갖게 되었다. 로트렉이 '나의 스승은 벨라스케스와 고야 그리고 일본의 위대한 예술가’라고 말하였는데, 그 일본의 위대한 예술가는 아마도 샤라쿠였을 것이다. 로트렉은 대부분 배경조차 생략한 채로 사람들의 순간적인 표정을 묘사해 내었고, 그 중에서도 극장의 포스터를 많이 그렸지만, 특히 가수 이베트 길베르, 무용수 쟌느 아브릴을 비롯한 당대에 활동했던 연애인들의 얼굴을 기이한 표정으로 그려내었다. 예쁘지 않은 그림 그것은 결코 추악한 것을 그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배우의 애써 꾸민 얼굴의 이면에 숨어있는 표정이 드러나는 찰나적인 순간만을 그려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로트렉은 샤라쿠의 프랑스적인 스타일로의 변모라고 할 것이다. 그가 샤라쿠를 통해서 표정의 강렬한 긴장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배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포스터를 들여다보면서 아이러닉한 그의 시선과 낙관 비슷하게 그려진 독특한 사인, 독특하게 못생긴 배우의 인상을 찾아 프랑스에서 자릴 잡은 샤라쿠를 찾아보는 것도 무척이나 재미있을 것이다
※ 1997년 열렸던 도슈사이 샤라쿠 재 해석전에서 설명된 도슈사이 샤라쿠. 이것은 도슈사이 샤라쿠와 김홍도의 관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우리가 아는 도슈사이 샤라쿠의 그림과 일대기에 대해서만 다룬 글입니다. 그러나 내용에서도 단 10개월만 활약했다는 말과 갑자기 등장했다는 부분은 역시 미스테리죠. 그리고 샤라쿠의 활동시기는 정확하게 김홍도의 실종시기와 겹칩니다. 거참..^^;
에도(江戶)시대(1603~1867)의 개막으로부터 약200년이 경과한 1794년(간세이<寬政>6년 : 에도시대 때의 한 연호)에 가부끼(歌舞伎 : 일본의 전통 가무극)배우의 얼굴에 중점을 둔 기묘한 우키요에(浮世繪: 에도시대에 성행한 풍속화)판화가 돌연 발표되었다. 그 화가의 이름은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齊寫樂). 그는 작가로서 10개월밖에 활동하지 않았으나 140여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 중에서도 초기에 발표된 28점의 오쿠비에(大首繪:얼굴에 테포르메를 가해 그린 그림)는 지금도 높이평가받고 있다.
당시 가부키의 인기 배우를 그린 우키오에 판화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기 연예인의 브로마이드로서 당시 모델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취향이 반영되어 아름답거나 혹은 늠름하게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샤라쿠의 오쿠비에는 인기 배우에서 단역에 이르기까지 그 모델의 내면을 파헤치는 듯한 리얼리즘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예리한 시선이 담겨있다.
짙은 화장으로 본얼굴을 감춘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샤라쿠는 골치 아프고, 반갑잖은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대담하게 테포르메(자연의 형상을 예술적으로 변형하는 것)하고 개성이 강한 오쿠비에는 율리우스 크르트의 저서[샤라쿠]가 1910년에 간행된 이후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되어 지금은 일본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광고탑과도 같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게 되었다. 샤라쿠가 해외에서 가장 저명한 일본의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 김홍도와 도슈사이 샤라쿠를 동일인물로 단정한 한 예
풍속화에서 김홍도(金弘道. 1745∼?)는 그 대표다. 신선도·산수화·인물화·판화·탱화 등 어느 분야 가릴 것 없이 그림 예술을 다 손댔지만 풍속화가로서 그의 이름이 가장 높고 확고하다. 특히 '俗'을 잘 그려 묘사했다. 그래서 그의 풍속화의 특징은 씨름판·글을 배우는 서당·시장판 등이 배경이 되고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정밀하게 묘사되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는 사민(四民)중에서 삼민(三民) 즉 농민, 장사치, 장인(匠人) 등의 생활과 애환을 주된 주제로 삼고, 기생·동물에 이르기까지 우리 땅에 있는 여러 모습을 그려 담았다. 지금도 「풍속도첩」은 그 백미로 꼽혀지고 있다. 그의 그림은 정밀함에서 출발하여 시원스럽고 힘이 넘친다. 그리고 남의 장점에 연연해서 보기 좋게 그리기에 쫓기기보다는 특징적인 모습, 더러는 가장 못난 부분이나 모습도 그대로 표현한다.
그리고 실학파의 사조와 기풍에 영향받은 그로서는 사실성 중시란 기조를 항상 잃지 않는다. 이런 중에 늘 노력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재창조의 세계를 끊임없이 펼쳐 나간다. 그는 스승 복헌 김응환에게서 배우기는 하지만 화풍은 단연코 달리하며 극복의 세계를 보여주는 창조 과정이었다. 특히 그는 1794년에 정조의 신임으로 연풍현감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정조의 밀명을 수행하는 한편 도슈사이 사라쿠(東洲제寫樂)란 이름으로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 배우들의 얼굴을 새긴 판화 150여점을 남겨 일본과 유럽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회화에 한 획을 긋기도 한다.
김홍도의 일생을 영화화 하는 것에 대한 기사(영화화 진행 소식은 이 이후로 없네요. 지난 2002년 12월 기사)
'단원 김홍도'가 일본의 천재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일까?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일본에 살았다는 천재 풍속화가 '도슈사이 샤라쿠'와 조선의 '단원 김홍도'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같은 문제가 순수 국내제작비 130억원을 들여 블록버스터 영화로 만들어진다. 다다엔터테인먼트(공동대표 김동구·김중신)가 내년 초 작업에 들어가는 영화 <단원 김홍도>가 그것.
지난 96년 9월16일 일본 아사히TV를 통해 <또 하나의 샤라쿠>라는 15분 분량의 기획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이 프로그램은 도슈사이 샤라쿠가 바로 단원 김홍도라는 일부 주장을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심층 취재한 것으로, 방송 후 단원 김홍도는 일본인들 사이에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다.
학자들은 이 무렵 조선에서 '증발'한 김홍도의 행적과 일본에 갑자기 등장한 도슈사이라는 화가를 같은 인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초등산수습방첩>이라는 '지펜샤 앗구'의 화첩을 들고 있다.
당시 도슈사이 샤라쿠는 10개월간 140여편의 초상화를 제작한 뒤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다. 그런데 일본화단의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샤라쿠가 그린 초상화의 선이 김홍도의 필선과 유사하고, 김홍도의 국내 행적이 묘연했던 시기가 바로 샤라쿠가 일본에 등장했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샤라쿠는 바로 김홍도였다고 국내 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이처럼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200여년 전의 이야기를 다룰 역사 스릴러물이다. 배경은 18세기 말로 일본의 천재화가 도슈사이 샤라쿠가 정말 단원 김홍도인가, 그리고 정조가 김홍도를 일본으로 보내 첩보활동을 시켰는가 등이 기둥 줄거리를 이룰 예정이다.
제임스 10/30[10:14]
정말 흥미있는 얘기네요..얼마전 백만불 미스테리에서 나온 홍길동과 일본의 홍가와라는 동일인물이라는 얘기 있는데...우리나라 역사속 인물들은 진짜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한것 같네여..
잿빛하늘 (

) 10/30[11:51]
이런 글을 올리실땐 문단좀 나눠주셈....
흥미있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빽빽한 글자들이 일단 거부감들 들게하네요 ㅡㅡ;
여까지 읽느라 고생했슴다. 애구 눈 아퍼.....
그래두 잼있는 가설이었슴다.
근대요 첩보활동 할라믄 말두 잘해야 하는데..... 짧은 시간에 김홍도가 일본말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을까요? 말이라는 것 뜻은 통해도 그 발음은 쉽게 터득할 수 있는게 아닐텐데요....
그래도 그림을 잘 그리니, 지형도나 군사배치도 등등을 그리기는 쉬웠을듯....
파랑 10/30[13:14]
잘읽었습니다. 저사실이 진짜라면 왠지 김홍도가 더 멋있는 사람이란 생각이드네여. 영화나오면 꼭보고 싶어요